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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세계 이야기

페론 주의 등장과 소멸, 군사정부의 더러운 전쟁 아르헨티나 정치 - 2부

by 시코르 2022.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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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1516년 부터 시작 되어 1580년에 완전히 식민 통치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페루 총독부의 지배를 받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별도의 총독주가 생겨서 분리 지배 하였으며 페루는 태평양 대상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유럽을 대상으로 하는 무역항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럽 무역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 해 오던 중 1806년 영국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 때 당시 나폴레옹 전쟁 승리 이후 자신감을 얻게 된 영국이 스페인 식민지인 아르헨티나에 욕심이 생겨 침략 하였으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이 힘을 합쳐 격퇴 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스페인의 무력함을 확인한 시민들은 독립을 추구하게 되었다.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 투쟁의 과정에서 1810년 5월 혁명이 일어 났으며 그 결과  1816년에 완전히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5월 혁명

1826년에는 포르투갈로 부터 독립한 이웃 국가 브라질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 원인은 스스플리티나 지역을 브라질이 무력으로 점령 하였으나 포르투갈이 아닌 스페인 출신 사람들이 많았던 이 지역은 브라질의 지배를 원치 않게 되어 독립 전쟁이 일어 나게 되었고 이를 아르헨티나가 개입 한 전쟁이다. 이 지역이 현재의 우루과이이고 브라질에 맞서 독립 전쟁을 함께 한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현재까지도 우호적인 국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루과이의 분리 독립


1853년 헌법을 제정하고 양원제와 대통령제 1880년에 부에노스아이래스가 수도로 지정 되어 연방제의 국가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1880년 부터 1929년까지 50년간 냉장선, 냉동선, 캔 같은 보관 유통기술을 활용하여 곡물과 육류 수출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1913년에는 남미에서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 되었으며 1920년대에는 세계 8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반면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발전 하지 못한다. 1930년대 부터 군부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커져 서서히 장악을 하다가 1943년 쿠데타로 후안 페론이 정계에 진출 하게 된다.  부통령이 된 후안 페론은 노동 친화력인 정책으로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노동조건 개선 ,임금인상  피지배층을 위한 정책들은 페론주의이라 불리이며 아르헨티나 정치에 화려하게 등장 한다. 좀 더 자세하게 페론주의란 중앙집권제, 민족적 경제 성장, 사회정의 구현를 큰 원칙으로 하고 노동조합의 세부적인 요청을 대폭 수용하는 대신 노동조합은 국가에 종속 된다는 국가 전체주의적 사상이다.

대중연설을 하는 에바 페론

후안 페론의 이런 노동 친화력인 정책이 점점 대중적인 인기가 커지게 되니 부담을 느낀 정치적 경쟁자들에 의해 페론은 기습적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엄청난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그의 부인인 에바 페론은 방송 및 연설을 통해 부당함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국민적인 석방운동을 이끌어 남편을  감옥에서 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대통령이 된 후안 페론은 노동자 임금인상, 수입 대체 산업 육성, 부패 척결, 외채 상환을 통한 독립 경제를 선언 하면서 곡물수출국영기업의 수익을 공공에 적극적으로 투자 하여 모든 이익을 국민에게 돌려주어 3년안에 25프로 경제성장을 이끌어 내었다. 엄청난 경제 성장을 통해 전 국민적인 인기을 얻은 페론 대통령은 임기 연장을 위한 헌법 개정이 진행 되었으며 페론 부부는 국민들로 부터 점점 우상화 되고 부부의 독재 정치가 시작 되었다.
하지만 1940년 후반부터 국재 곡물 가격이 하락이 시작 되게 된다. 곡물수출로 인한 이익이 줄어 들자 공공부문에 투자 할 재원이 부족해 졌고 이에 더해 정치적으로 독재자에 부정적인 미국의 견제로 아르헨티나의 곡물 구매를 막는 정책이 시작 되어 아르헨티나는 심각한 경제 후퇴가  시작 된다.  국민적으로 노동자의 어머니, 성녀로 추앙 받던 에바 페론 부인이 1950년에 사망 한 이후 후안 페론은경기 후퇴를 막기 위해서 정책 노선을 친기업적, 친자본 정책으로 급격하게 변경 하였으나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지병으로 사망한 에바 페론

경기 불황으로 민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1955년 군사 쿠테가가 일어나서 후안 페론은 스페인으로 쫓기듯이 망명을 가게 되었고 약 20년 후 국민들의 요청으로 1973년 아르헨티나로 복귀 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다시 대통령이 된 후안 페론이 1974년 7월에 사망하고 이 혼란을 이용한 군부가 쿠테타가 일어났는데 이 것이 아르헨티나가 선진국에서 후진국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 하게 된다. 군부는 정권을 잡자 마자 무력으로 의회 해산, 노동조합 해산 , 자국민을 상대로 납치, 고문, 살해 하는 이른바 더러운 전쟁을 광범위 하게 진행 하였다. 1980년대에 군부로 부터 고문을 받은 사람이 약 40만명, 살해 당한 사람이 약 10만명 그리고 연좌제를 적용하여 죄를 가족들까지 적용하여 그 피해자는 수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다.
군부의 악행이 지속 되어 국민 민심이 악화 되자 반전을 위한 카드로 군부는 급격하게 시장주의 개방 경제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 시장 개방이 되어 경제 활성화는 되지 않고 대규모의 해외 부채만 발생하여 국가 경제가 파탄 나는 역효과만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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